넷플릭스를 보다 서양 장례식 장면을 보았다. 매우 색다르다.
블랙 앤 화이트인 우리나라 장례식장과는 달리 화사한 파스텔 벽지를 사용하기도 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꽃과 단아한 조명들로 입장하는 순간 온화하고도 따스함이 느껴진다.
출처: '코민스키 메소드'
넷플릭스를 보다 서양 장례식 장면을 보았다. 매우 색다르다. 블랙 앤 화이트 톤의 우리나라 장례식장과는 달리 화사한 파스텔 벽지를 사용하기도 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꽃과 단아한 조명들로 입장하는 순간 온화하고도 따스함이 느껴진다
출처 : 넷플릭스 드라마 <힐하우스의 유령>
서양에는 '뷰잉(viewing)'이라는 장례 문화가 있다. 장례식 때 유가족을 비롯한 모든 조문객들에게 시신을 보여준다.
넷플릭스 드라마 <힐하우스의 유령>을 보면 장례가 이루어지는 내내 뷰잉을 한다. 장례식장 정면엔 관이 놓여있고, 그 안에 살아생전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복원된 시신이 곤히 잠이 든 듯 누워있다. 조문객들은 고인에게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입관식 때 유가족만 잠시 고인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장례 문화와 달리, 장례식 내내 조문객은 저마다 원하는 속도와 순간에 고인을 볼 수 있다. 슬픔과 충격에 곧장 관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바로 죽음을 마주하기 힘들어 하루 이틀 자신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다가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떠했는가. 입관식, 오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때를 떠올린다. ‘유가족은 와서 고인에게 인사하라’는 장의사의 안내에도 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무서웠다. 죽음, 시체, 시신이라는 말에 나는 흉측한 몰골의 시신을 떠올렸고 혹시 모를 충격과 두려움을 피하고만 싶은 본능이 일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30분도 채 안 되었다. 나는 애써야만 했다. 스스로를 다독이고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못 본다고, 평생 후회할지 모른다고, 이렇게 무서워할 시간이 없다고. 한없이 웅크려있는 용기를 억지로 끄집어내야만 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겨우 유리창 너머의 오빠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무서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곧장 아들에게로 달려가 요절하듯 얼굴을 쓰다듬는 엄마와 달리, 난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발 언저리에서 오빠의 얼굴을 힐끔댈 뿐이었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장의사는 이제 입관을 하겠다며 마지막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다시금 정신을 차려야 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안간힘을 써서 겨우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오빠와의 마지막 접촉이자 인사였다.
결코 충분하지 않은 시간에 난 급히 고인을 마주하고 빼앗기듯 보내줘야만 했다. 왜 이리 급한 것인가. 왜 고인의 마지막 모습, 시신을 볼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가.당시에 궁금하지 않았다. 쫓기듯 보내주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의 겁과 두려움, 주저함이 당연한 줄 몰랐다. 저마다 다른 이별의 속도와 반응을 담기에 입관 시간은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만약 좀 더 오래 오빠와 함께했다면, 그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죽음이란 어둡고 무서운 편견이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가까이 다가가진 못해도 멀찍이 잠든 밤바다를 바라보듯 고요히 그의 마지막 모습을 깊게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이나마 더 진솔하고 깊은 말은 오빠에게 건네지 않았을까.
넷플릭스를 보다 서양 장례식 장면을 보았다. 매우 색다르다.
블랙 앤 화이트인 우리나라 장례식장과는 달리 화사한 파스텔 벽지를 사용하기도 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꽃과 단아한 조명들로 입장하는 순간 온화하고도 따스함이 느껴진다.
출처: '코민스키 메소드'
출처: '코민스키 메소드'
넷플릭스를 보다 서양 장례식 장면을 보았다. 매우 색다르다. 블랙 앤 화이트 톤의 우리나라 장례식장과는 달리 화사한 파스텔 벽지를 사용하기도 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꽃과 단아한 조명들로 입장하는 순간 온화하고도 따스함이 느껴진다
출처 : 넷플릭스 드라마 <힐하우스의 유령>
서양에는 '뷰잉(viewing)'이라는 장례 문화가 있다. 장례식 때 유가족을 비롯한 모든 조문객들에게 시신을 보여준다.
넷플릭스 드라마 <힐하우스의 유령>을 보면 장례가 이루어지는 내내 뷰잉을 한다. 장례식장 정면엔 관이 놓여있고, 그 안에 살아생전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복원된 시신이 곤히 잠이 든 듯 누워있다. 조문객들은 고인에게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입관식 때 유가족만 잠시 고인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장례 문화와 달리, 장례식 내내 조문객은 저마다 원하는 속도와 순간에 고인을 볼 수 있다. 슬픔과 충격에 곧장 관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바로 죽음을 마주하기 힘들어 하루 이틀 자신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다가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떠했는가. 입관식, 오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때를 떠올린다. ‘유가족은 와서 고인에게 인사하라’는 장의사의 안내에도 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무서웠다. 죽음, 시체, 시신이라는 말에 나는 흉측한 몰골의 시신을 떠올렸고 혹시 모를 충격과 두려움을 피하고만 싶은 본능이 일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30분도 채 안 되었다. 나는 애써야만 했다. 스스로를 다독이고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못 본다고, 평생 후회할지 모른다고, 이렇게 무서워할 시간이 없다고. 한없이 웅크려있는 용기를 억지로 끄집어내야만 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겨우 유리창 너머의 오빠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무서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곧장 아들에게로 달려가 요절하듯 얼굴을 쓰다듬는 엄마와 달리, 난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발 언저리에서 오빠의 얼굴을 힐끔댈 뿐이었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장의사는 이제 입관을 하겠다며 마지막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다시금 정신을 차려야 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안간힘을 써서 겨우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오빠와의 마지막 접촉이자 인사였다.
결코 충분하지 않은 시간에 난 급히 고인을 마주하고 빼앗기듯 보내줘야만 했다. 왜 이리 급한 것인가. 왜 고인의 마지막 모습, 시신을 볼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가.당시에 궁금하지 않았다. 쫓기듯 보내주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의 겁과 두려움, 주저함이 당연한 줄 몰랐다. 저마다 다른 이별의 속도와 반응을 담기에 입관 시간은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만약 좀 더 오래 오빠와 함께했다면, 그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죽음이란 어둡고 무서운 편견이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가까이 다가가진 못해도 멀찍이 잠든 밤바다를 바라보듯 고요히 그의 마지막 모습을 깊게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이나마 더 진솔하고 깊은 말은 오빠에게 건네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