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권과로자살 유가족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애도 방식

김설
2023-01-16

과로자살 유가족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애도 방식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를 읽고

배고은


김설 작가의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는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가족의 시점에서 담담히 적어낸 애도일지다. 해마다 7만 명의 자살유가족이 발생하지만,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보다는 죽은 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저자는 죽은 자와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왜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책 속에서 작가의 어머니는 아들의 흔적을 일부러 지우려 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메시지를 보내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쓴다. 한 글자 한 글자 자식에 대한 마음을 적어낸 모정이 너무도 슬퍼 마음을 억누른 채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의 한 페이지가 눈물로 젖어 들었다.




"모든 게 그립다. 삶은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네가 갔다고 했을 때 네가 스스로 무거운 짐을 벗었구나 했다. 그렇게 너에 대한 내 짐도 벗어지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잊지 않을게. 맘이 아프지만 그래도 간직해야지."

출처 입력




그러다 가슴 한쪽에 맺혀 있던 무언가가 터져버린 듯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 이성적일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나 또한 과로자살유가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왔지만 형부가 죽은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생일이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애도작업보다는 현실에 직면한 문제(산재신청)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만 있었다.


지금의 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노동자의 업무 관련 기록이나 정보제공에 대한 기업의 협조가 당연한 시스템도 아니거니와 국가의 법령 자체도 노동자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증명해내는 것은 유가족의 몫이다.


엄청난 부담감을 움켜쥐고,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진정한 애도 작업이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많은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의 이유는 다양하다. 죽음의 원인을 이해하는 방식이 사회구조나 문화에 따라 상이할 수 있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자살은 유약한 개인을 탓하며, 사회적 죽음이 아닌 개인의 죽음으로써 치부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살유가족에게는 이런 환경이 더욱 가혹하기만 하다.


안현선 작가의 <죽음, 그 달콤한 유혹과의 결별>에서처럼 남겨진 자들은 너무도 섣부른 '속단적 결론(가족을 죽인 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살유가족들은 더 많은 죄책감 속에 시달린다.




"자기 정죄는 가족이 자살로 떠났다는 사인을 알게 되는 순간 거의 즉각적으로 진행된다. ... 바른 애도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흘려보내는 법을, 바르게 슬퍼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장례식 당시에 ritural에 참여하지 못했다. 정당한 애도가 아닌 performance를 치렀다. 접객은 하였으나 애도를 못 하였다." (안현선 <죽음, 그 달콤한 유혹과의 결별> 중에서)

출처 입력




아마도 우리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너무 빨리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고(경찰수사 과정), 타인의 시선을 피하느라 내 자신을 지킬,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올바른 애도법을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르게 슬퍼하는 법, 떠나보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과연 우리는 "그 슬픔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김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준비가 필요하다. 진정한 애도작업이 가능할 때 남겨진 우리도 남은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럴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기란 쉽지 않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애도하기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우리 각자는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살유가족으로서 당면하고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똑같진 않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김설 작가는 산재신청을 하는 대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애도작업을 진행했다.


그에 대한 결과물이 바로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이다.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정한 일상에 대한 작가의 고백이 낯설지 않은 것은 비슷한 경험을 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애도작업이 이뤄져야 주변을 살필 여유도 생긴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고, 쉽지 않은 도전에 첫발을 내딛은 김설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에도 경의를 표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국 과로사 과로자살 유가족모임 배고은님이 작성한 글입니다.


기사 원문보기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저자김설출판위고발매2022.11.25.


 

그럼에도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우리 각자는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살유가족으로서 당면하고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똑같진 않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과로자살 유가족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애도 방식, 오마이뉴스, 배





과로자살 유가족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애도 방식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를 읽고

배고은






김설 작가의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는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가족의 시점에서 담담히 적어낸 애도일지다. 해마다 7만 명의 자살유가족이 발생하지만,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보다는 죽은 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저자는 죽은 자와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왜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책 속에서 작가의 어머니는 아들의 흔적을 일부러 지우려 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메시지를 보내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쓴다. 한 글자 한 글자 자식에 대한 마음을 적어낸 모정이 너무도 슬퍼 마음을 억누른 채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의 한 페이지가 눈물로 젖어 들었다.

 



"모든 게 그립다. 삶은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네가 갔다고 했을 때 네가 스스로 무거운 짐을 벗었구나 했다. 그렇게 너에 대한 내 짐도 벗어지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잊지 않을게. 맘이 아프지만 그래도 간직해


그러다 가슴 한쪽에 맺혀 있던 무언가가 터져버린 듯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 이성적일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나 또한 과로자살유가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왔지만 형부가 죽은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생일이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애도작업보다는 현실에 직면한 문제(산재신청)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만 있었다.


지금의 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노동자의 업무 관련 기록이나 정보제공에 대한 기업의 협조가 당연한 시스템도 아니거니와 국가의 법령 자체도 노동자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증명해내는 것은 유가족의 몫이다.


엄청난 부담감을 움켜쥐고,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진정한 애도 작업이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많은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의 이유는 다양하다. 죽음의 원인을 이해하는 방식이 사회구조나 문화에 따라 상이할 수 있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자살은 유약한 개인을 탓하며, 사회적 죽음이 아닌 개인의 죽음으로써 치부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살유가족에게는 이런 환경이 더욱 가혹하기만 하다.


안현선 작가의 <죽음, 그 달콤한 유혹과의 결별>에서처럼 남겨진 자들은 너무도 섣부른 '속단적 결론(가족을 죽인 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살유가족들은 더 많은 죄책감 속에 시달린다.




"자기 정죄는 가족이 자살로 떠났다는 사인을 알게 되는 순간 거의 즉각적으로 진행된다. ... 바른 애도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흘려보내는 법을, 바르게 슬퍼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장례식 당시에 ritural에 참여하지 못했다. 정당한 애도가 아닌 performance를 치렀다. 접객은 하였으나 애도를 못 하였다." (안현선 <죽음, 그 달콤한 유혹과의 결별> 중에서) 




아마도 우리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너무 빨리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고(경찰수사 과정), 타인의 시선을 피하느라 내 자신을 지킬,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올바른 애도법을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르게 슬퍼하는 법, 떠나보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과연 우리는 "그 슬픔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김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준비가 필요하다. 진정한 애도작업이 가능할 때 남겨진 우리도 남은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럴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기란 쉽지 않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애도하기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우리 각자는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살유가족으로서 당면하고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똑같진 않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김설 작가는 산재신청을 하는 대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애도작업을 진행했다.


그에 대한 결과물이 바로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이다.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정한 일상에 대한 작가의 고백이 낯설지 않은 것은 비슷한 경험을 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애도작업이 이뤄져야 주변을 살필 여유도 생긴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고, 쉽지 않은 도전에 첫발을 내딛은 김설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에도 경의를 표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국 과로사 과로자살 유가족모임 배고은님이 작성한 글입니다.


기사 원문보기 


그럼에도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우리 각자는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살유가족으로서 당면하고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똑같진 않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과로자살 유가족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애도 방식, 오마이뉴스, 배고은







과로자살 유가족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애도 방식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를 읽고

배고은






김설 작가의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는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가족의 시점에서 담담히 적어낸 애도일지다. 해마다 7만 명의 자살유가족이 발생하지만,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보다는 죽은 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저자는 죽은 자와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왜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책 속에서 작가의 어머니는 아들의 흔적을 일부러 지우려 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메시지를 보내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쓴다. 한 글자 한 글자 자식에 대한 마음을 적어낸 모정이 너무도 슬퍼 마음을 억누른 채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의 한 페이지가 눈물로 젖어 들었다.

 



"모든 게 그립다. 삶은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네가 갔다고 했을 때 네가 스스로 무거운 짐을 벗었구나 했다. 그렇게 너에 대한 내 짐도 벗어지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잊지 않을게. 맘이 아프지만 그래도 간직해야지."




그러다 가슴 한쪽에 맺혀 있던 무언가가 터져버린 듯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 이성적일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나 또한 과로자살유가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왔지만 형부가 죽은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생일이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애도작업보다는 현실에 직면한 문제(산재신청)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만 있었다.


지금의 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노동자의 업무 관련 기록이나 정보제공에 대한 기업의 협조가 당연한 시스템도 아니거니와 국가의 법령 자체도 노동자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증명해내는 것은 유가족의 몫이다.


엄청난 부담감을 움켜쥐고,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진정한 애도 작업이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많은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의 이유는 다양하다. 죽음의 원인을 이해하는 방식이 사회구조나 문화에 따라 상이할 수 있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자살은 유약한 개인을 탓하며, 사회적 죽음이 아닌 개인의 죽음으로써 치부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살유가족에게는 이런 환경이 더욱 가혹하기만 하다.


안현선 작가의 <죽음, 그 달콤한 유혹과의 결별>에서처럼 남겨진 자들은 너무도 섣부른 '속단적 결론(가족을 죽인 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살유가족들은 더 많은 죄책감 속에 시달린다.




"자기 정죄는 가족이 자살로 떠났다는 사인을 알게 되는 순간 거의 즉각적으로 진행된다. ... 바른 애도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흘려보내는 법을, 바르게 슬퍼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장례식 당시에 ritural에 참여하지 못했다. 정당한 애도가 아닌 performance를 치렀다. 접객은 하였으나 애도를 못 하였다." (안현선 <죽음, 그 달콤한 유혹과의 결별> 중에서) 




아마도 우리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너무 빨리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고(경찰수사 과정), 타인의 시선을 피하느라 내 자신을 지킬,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올바른 애도법을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르게 슬퍼하는 법, 떠나보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과연 우리는 "그 슬픔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김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준비가 필요하다. 진정한 애도작업이 가능할 때 남겨진 우리도 남은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럴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기란 쉽지 않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애도하기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우리 각자는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살유가족으로서 당면하고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똑같진 않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김설 작가는 산재신청을 하는 대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애도작업을 진행했다.


그에 대한 결과물이 바로 <아직 이 죽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릅니다>이다.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정한 일상에 대한 작가의 고백이 낯설지 않은 것은 비슷한 경험을 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애도작업이 이뤄져야 주변을 살필 여유도 생긴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고, 쉽지 않은 도전에 첫발을 내딛은 김설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에도 경의를 표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국 과로사 과로자살 유가족모임 배고은님이 작성한 글입니다.


기사 원문보기